일부러 최대한 관련 정보를 보지 않고 갔다. 뭐 나는 다른 모든 영화들을 볼 때도 웬만하면 그렇게 하기는 하지만.. 예고편도 가급적 안 보는 편. 어차피 볼 영화면 직접 영화를 보면 되고, 안 볼 영화를 예고편 본다고 관심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거 같다.

왜가리 이미지와 제목 덕분에 '코쿠리고 언덕에서' 같은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섞인 작품일 거라 예상했으나 실상은 뭐랄까 '하야오 종합 선물세트'같은 영화였다. 지금까지 나왔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었던 이미지나 플롯들이 왕창 섞인 거 같은 느낌. 문제는 정말 섞이기만 하고 정돈이 썩 매끄럽진 않았다. 영화 끝나자마자 내 주위의 모든 관객들이 '이게 대체 뭔소리야'를 연발하더라(...). 나도 썩 이해가 된 건 아니지만 이미지를 이미지대로, 상징을 상징 자체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지브리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는 거 같다 라는 감상이었다. 주인공 마히토는 일상에서 살다가 어느날 이상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한바탕 모험을 겪은 후에 현실로 복귀한다. 이 구조가 앨리스랑 똑같고, '이상한 세계'가 현실의 법칙과는 판이하게 다르며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는 것도 같다. 앨리스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차라리 이 영화가 훨씬 친절함(...). 

사실 주제적으로는 대부분의 일본 컨텐츠에서 하던 내용이라 별 새로운 부분이 없었다. 결국 '큰할아버지'가 만든 허구와 악의의 세상을 승계하는 것을 거부하고 현실에서 살아가겠다는 내용. 이런 애니 56개는 봤음 ㅋㅋ.. 그럼에도 갖고 있는 이 영화의 장점은 지브리 특유의 아름다운 그림과 다양한 캐릭터, 장소를 만들어 냄으로서 풍부한 독해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 보면서 '저 장면은 저런 의미겠군' 스스로 해설을 덧붙이면서 봤다. 덕후적으로는 이런 분석이 재미있지만 까놓고 말하면 걍 내 생각에 불과할 뿐이고 이렇게라도 납득하지 않으면 전개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소리기도 하다.  

해설을 찾아보니 감독의 자전적인 부분이 많이 들어간 영화라고 볼 수 있다고. 실제로 영화 시작하자마자 사이렌이 울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는 것과 시대배경(2차대전)을 보면 반전주의자면서도 밀리터리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하는 성향이 여전함을 알 수 있고, 겉핡기로 지브리 영화들을 본 나도 기존 작품의 패러디를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그대로 배껴온 듯한 컷도 있고, 현실에서 다른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구조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상당히 유사하다. 

정말로 이 영화가 자전적인 영화라면 유추할 수 있는 감상이 있는데, 결국 이 영화에서 감독과 가장 닮은 건 '큰할아버지'일 것이다. 기기묘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냈지만 결국 그 세계에서도 팰리컨과 앵무새로 대표되는 '악의'를 떨쳐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보여준다. 그런 세계를 후대에게 승계하고자 하나 후대는 그 승계를 거부한다. 자신도 악의에 물든 부분이 있다면서. 그리고 세계는 붕괴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과 허구의 세계가 의미를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결국 은퇴를 번복했지 이 양반(...). 제목은 결국 극 내용과 아무 상관없는 듯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스스로와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덧. 사실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엔딩인데, 모험에서 복귀하고 나서 에필로그 형식으로 뭔가를 보여줄 법도 한데 단 두컷만에 영화를 끝내버린다(...). 자기 할 말 끝났다고 고대로 끝내버리다니 당신이 이영도요? 거의 폴라리스 랩소디급 엔딩..  

덧 2. 영화가 끝나고 가득 찬 관객들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반인들과 오타쿠들의 차이점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는데, 오타쿠들은 이런 영화를 보고 나서 '이게 무슨 의미지? 이 캐릭터는 왜 이렇게 행동했지?'를 막 찾아볼 것이라면 일반인들은 '하 영화 참 희안하게 만들었네' 하고 집에 가서 저녁밥 먹으며 뒷담 한번 까고 싹 잊어버릴 것이라는 점(...). 뭐 요새는 나무위키가 등장해서 (그것이 오독이고 주관적일 가능성이 높은 건 차치하고) 텍스트 해석 자체는 굉장히 쉬워진 편이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안할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음침하게 대화를 훔쳐듣다 보니 별로 그렇게 궁금하진 않나 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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