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전생을 읽고 좀 별로라서 (나는 환생을 소재로 쓴 장르물이 어떻게 환생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고 넘어가는 작품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명작 무협이 읽고 싶어졌다. 역시 무협의 근본 하면 김용 아니겠는가. 대학 시절 최소한의 장르적 교양(?)을 쌓고자 사조 삼부곡까지는 읽었었다. 오래되어서 기억은 잘 안나지만 꽤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음. 그 외 유명하고 한국에서 읽기 수월한 김용 작품으로는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가 있을 텐데, 일단은 팔부중이라는 판타지틱한 소재를 썼다는 점이 좋아 천룡팔부를 읽어보기로 했다.
읽기 시작 전에 난관이 좀 있었는데, 강남구통합도서관에 검색해보니 신수판(개정판. 김용작품들은 구판과 신판이 나눠져 있는 경우가 많다)을 보유하고 있는곳이 단 한곳도 없었다. 아니 그래도 천하의 김용인데 너무한 거 아냐? 구판도 구판만의 매력이 있겠지만 그래도 개정판이 있는데 굳이 구판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서 읽으면 되긴하지만 김용 소설들은 하나같이 분량이 많은지라 일단 번역된 것들은 다 읽어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만 소장할 생각이었다.
대차서비스 같은 것까지 찾아보며 책바다라는 서비스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그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밀리의 서재에서 검색해보니 다행히도 김용 소설 대부분이 있는 듯했다. 내가 책은 자주 읽어도 밀리는 이용할 생각을 안했었는데 뭐 자기개발서 같은 대중픽(?)들만 있을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에 검색해보니 장르 소설들도 생각보다는 좀 있었다. 다만 시리즈 도서를 듬성듬성만 보유하고 있는 등 딱 기대보다는 낫다 정도?
어쨌든 드디어 읽게 된 천룡팔부. 읽다가 '과연 신필'이라고 감탄한 장면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삼부곡들보다 더 재밌는 듯?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잘 안나긴 한다만) 이 소설을 한단어로 정의하자면 '스케일'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모든 점에서 스케일이 크다. 수많은 인물들, 다양한 사건, 기기묘묘한 무공들, 사람 간의 정과 인연에 대한 깨달음, 생과 사에 대한 고찰 등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무협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고전 무협 답게 글발이나 인물들이 호방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믿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위급한 상황에서 세 주인공들이 의형제를 맺는 장면은 그 절정이라 할 만하다. 단 그렇기에 캐릭터들이 극단적이고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은 감안해야. 그냥 지 멋대로 단정하고 착각해서 폭주하는 장면도 허다하다. 그래도 대부분 캐릭터 조성이 매력적인데 단 하나, 왕어언 만큼은 마무리가 좀 이상하다. 등장 이후 몇 권에 걸쳐 자신의 외모에 대해 집작하거나 나이듦에 대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적이 없는데 갑자기 마지막 몇 페이지에 그렇게 된다. 아마 신수판을 내면서 단예와 헤어지게 만들고 싶은데 마땅한 명분이 없어서 캐릭터를 망가뜨린 듯한데.. 그림으로 그린듯한 캐붕.
불교와 도교 등 종교적인 깨달음에 대한 성찰이 많다. 인간의 집작에 대한 극복의 테마가 소설의 바탕에 깔려있다. 인물들은 상당수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럼에도 크게 슬프지 않은 이유가 그래서인 듯하다. 그렇다고 마냥 딱딱한 소설이냐면 그렇지도 않고 웃긴 묘사들과 개그캐릭터들도 은근히 나온다.
스케일이 크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를 해서 한꺼번에 읽지 않으면 전에 한 이야기를 까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소설이 신문연재 작품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장면 전환이 급작스러운 감이 있음. a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재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b 이야기로 넘어간다거나. 2권의 떡밥이 8권에 해결된다거나 하는 등 굉장히 긴 호흡에 걸쳐서 진행되기 때문에 집중이 좀 필요한 소설이다.
소장 가치 1000%지만 아직 소오강호와 녹정기를 안 읽어봤으니.. 언제쯤 무협 쿨이 다시 차려나.
덧, 지금까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무협은 화산귀환인데 화산귀환도 화산전생처럼 전생한 원인 안 밝히고 끝날까봐 겁난다; 주인공부터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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